
대기업 반도체 팀장 명함을 던지고 중소기업에 합류해 1300억원대 주식 거부가 된 반도체 장비사 대표.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미국 국방부 배터리 납품 예정 기업으로 키워내며 500억원대 돈방석에 앉은 전문경영인(CEO). 창업주나 오너 2세가 아님에도 수십~수천억원대 자산가로 등극하는 중소·중견기업 전문경영인이 속출하고 있다. 회사를 강소기업으로 키워낸 이들은 국내 일자리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월급쟁이’들에게 실질적인 롤모델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2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년간 KRX 반도체 지수, KRX 2차전지 K-뉴딜지수, iSelect K-로봇테마 지수는 각각 420%, 137%, 186% 올랐다. 대기업뿐 아니라 관련 밸류체인에 속한 알짜 중소·중견기업들의 주가가 크게 뛰면서 지수 상승세를 견인했다. 오랫동안 축적한 스톡옵션과 꾸준한 자사주 매수가 최근 첨단산업 주가 랠리와 맞물려 중기 CEO들을 ‘주식부자 샐러리맨’으로 만들었다.

국내 휴머노이드 대장주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이정호 대표는 보유 지분 가치가 5361억원에 달해 비오너 중 최고 주식 부호에 올랐다. 반도체 장비 기업 테스의 이재호 대표 역시 1318억원 규모의 주식을 쥐며 자산가 반열에 섰다. 리튬 배터리 기업 비츠로셀의 장승국 대표(585억원), 반도체 검사장비 기업 넥스틴의 박태훈 대표(556억원)등도 수백억원대 대박을 터뜨렸다. 이 밖에 최문호 에코프로비엠 대표(266억원), 허진영 펄어비스 대표(93억원), 이동철 하나마이크론 대표(77억원), 김상현 칩스앤미디어 대표(57억원) 등도 평범한 샐러리맨의 한계를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국내 주식시장 상승세로 인해 촉발된 샐러리맨 부자 열풍이 한국 중기 생태계의 질적 변화를 가져올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자본과 인재가 쏠리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유능한 전문경영인이나 임직원이 대형 빅테크 대신 중소기업에 합류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것이 일상이다. 국내 한 중소기업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가 강한 건 뛰어난 창업자뿐 아니라 유능한 샐러리맨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며 “국가 산업의 허리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선 월급쟁이 대표나 임직원이 파격적인 주식 보상을 통해 거액의 자산가로 올라서는 성공 사례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월급쟁이 역전극"…스톡옵션 잭팟 터진 中企 ‘월급쟁이 CEO’

2000년대 초 장승국 비츠로셀 대표가 합류했을 당시, 회사는 군용 무전기 배터리를 간간이 납품하던 작은 기업이었다. 2008년 지휘봉을 잡은 장 대표는 전면적인 체질 개선에 착수했다. 군수용 중심의 사업 구조를 전자계량기(스마트 미터기) 등 민수 시장으로 넓혔고, 직접 전 세계를 뛰며 수출 비중을 끌어올렸다. 최근에는 진입 장벽이 높은 미국 국방부(펜타곤)와 군용 배터리 공급 논의를 진행할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매출 200억원대였던 회사는 올해 매출 3000억원대, 영업이익 1000억원대의 알짜 강소기업으로 거듭났다.
반전 드라마에 주가는 폭등했다. 비츠로셀 주가는 지난 1년간 265%, 5년 전과 비교하면 689%나 뛰었다. 초기부터 책임경영을 위해 주식을 꾸준히 사 모은 장 대표의 지분 가치도 585억원으로 불어났다. 최근 국내 증시를 이끄는 반도체·배터리·로봇 분야에서는 장 대표처럼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주식 대박’을 터뜨린 전문경영인들이 대거 쏟아지고 있다. 이들의 성공 방정식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압축된다. ①회사 초기부터 수십년간 함께한 개국공신형 ②어느정도 회사가 성장한 후 영입된 용병형 ③사모펀드가 영입한 가치극대화형 등이다.
①회사를 초창기부터 키운 ‘개국공신형’

회사의 밑바닥부터 함께 구른 개국공신들에게는 극적인 서사가 하나씩 있다. 이재호 테스 대표는 2002년 현대전자산업(현 SK하이닉스)의 장비개발 팀장 자리를 던지고 테스 창립 초기에 합류해 연구소장을 맡은 인물이다. 전무, 부사장을 거쳐 2016년 대표에 오른 그는 외산 기업이 독점하던 반도체 전공정 장비 시장에서 하이브리드 가스에칭장비(GPE), 플라즈마 화학기상증착장비(PECVD) 등 핵심 장비의 국산화를 이뤄냈다. 테스 주가가 지난 1년간 460% 이상 상승하면서 이 대표의 보유 지분 가치는 1318억원에 달한다.
이정호 레인보우로보틱스 대표도 성공한 창립 멤버다. 카이스트 연구원 시절부터 오준호 창업주(석좌교수)와 이족보행 로봇 개발에 매달렸던 그는 국내 휴머노이드 대장기업을 키워내며 비오너 주식 부호 1위(5361억원) 자리에 올랐다. 이 회사의 주가는 지난 5년간 3350% 폭등했다. 에코프로그룹의 ‘양극재 신화’를 쓴 주역들도 회사 초창기부터 함께했다. 생존을 걱정하던 2000년대 초반 입사한 최문호 에코프로비엠 대표(266억원)와 김병훈 에코프로머티리얼즈 대표(29억원)는 하이니켈 양극재 국산화라는 승부수를 띄워 회사를 배터리 소재 거물로 키워냈다. 작은 연구소 평사원으로 시작해 에스피지(SPG)를 로봇 감속기 국내 1위로 올린 여영길 대표(64억원), 코스맥스 창립 멤버로 중국 시장을 개척한 최경 대표(40억원) 역시 오랜 '헌신의 대가'를 증시에서 보상받았다.
②대기업에서 대표로 영입된 ‘용병형’
안정적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중소기업 대표로 영입된 ‘용병형’ 경영자들의 약진도 매섭다. 이동철 하나마이크론 대표는 삼성전자와 삼성SDI에서 전사 전략과 기획 등을 담당하던 골수 ‘삼성맨’이었다. 최창호 하나마이크론 회장에 의해 2019년 영입된 이 대표는 공격적인 글로벌 스케일업 전략을 감행했다. 반도체 미세화 공정의 한계로 후공정(패키징 및 테스트)의 중요성이 급부상할 것을 예견하고 베트남 법인을 중심으로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했다. 그 결과 2019년 4737억원이던 매출은 올해 2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 기간 주가가 1800% 넘게 뛰며 이 대표의 지분 가치도 77억원으로 불어났다.카카오게임즈 등을 거쳐 2017년 펄어비스에 합류한 허진영 대표도 성공 모델이다. K-게임 산업의 극심한 침체기 속에서도 신작 ‘붉은사막’의 글로벌 누적 판매량 500만 장을 돌파시키며 회사의 구원투수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허 대표의 보유 주식 가치는 현재 93억원이다.
③기업 가치 반전 이룬 사모펀드 ‘해결사형’
가장 트렌디한 모델은 사모펀드(PEF)의 부름을 받은 ‘해결사’들이다. 2017년 반도체 장비사 HPSP를 인수한 사모펀드 크레센도는 2020년 ASML 코리아 출신 김용운 전 대표를 기업 가치를 높여 상장에 성공시킬 적임자로 낙점했다. 김 전 대표는 ‘고압 수소 어닐링 장비’의 글로벌 독점적 상업화에 집중했다. 기술 고도화와 글로벌 탑티어 파운드리 및 메모리 업체들과의 네트워크를 확장한 결과, 2022년 상장 이후 현재까지 주가 상승률 405%를 기록했다. 김 전 대표의 보유 주식 가치는 현재 주가 기준 263억원이다.‘차석용 매직’으로 불리는 차석용 휴젤 전 대표도 상징적이다. LG생활건강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는 2023년 글로벌 사모펀드 베인캐피탈에 의해 전격 영입된 후, 올해 3월까지 회사를 이끌며 글로벌 보톡스 영토를 넓히고 주가를 2배 이상 띄웠다. 본인도 140억원 규모의 차익을 실현하며 해결사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슈퍼 샐러리맨’ 부호들의 등장이 개인의 대박을 넘어 국내 중소·중견기업 생태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모멘텀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중소벤처기업 대표는 “국내 경제 허리인 중견·중소기업을 강화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결국 인재 수혈”이라면서 “파격적인 주식 보상 관행이 늘어나야 하고, 정부의 전폭적인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상훈 기자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