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 전쟁, 대만 문제, 무역분쟁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양국 간 해결책이 마련됐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지난 5월 13~15일 베이징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 대해 ‘노딜’이라는 혹평을 쏟아냈다. 2017년 이후 9년 만의 중국 방문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과 우호적인 장면을 연출했지만 핵심 현안에서서는 구체적인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판매 문제를 하나의 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면서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동맹의 불안감만 증폭시켰다. 시 주석은 미·중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G2(2국)’ 구도를 제시하며 공존을 강조했지만 교착 상태에 빠진 양국 관계 돌파구는 만들지 못했다. 시 주석은 올가을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협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란 전쟁·호르무즈 합의 기대 이하
트럼프는 이번 방중 일정에서 시 주석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웠지만 이란 전쟁과 관련해 기대한 만큼 중국의 역할을 끌어내지 못했다. 양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고 이란이 봉쇄한 호르무즈해협의 통행 재개도 촉구했다. 특히 “어떤 국가, 조직도 통행료를 부과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며 호르무즈해협 통행료 부과를 주장해온 이란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시주석이 정상회담에서 호르무즈해협의 재개방을 원하며 이란에 군사장비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중국이 이란 전쟁 초기부터 호르무즈해협 자유 항행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이 호르무즈해협 개방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약속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중국 외교부는 이란 전쟁을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이란 전쟁이 세계경제와 에너지 공급망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이란에 영향력을 행사해 휴전 협상이 성사될 수 있기를 기대했던 미국으로서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중국 측 발표문에 이란 비핵화에 대한 합의나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통제에 반대한다는 공식적인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중국 방문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도 5월 18일 이란에 대한 군사공격 재개를 보류하며 “이란이 핵무기 갖지 못하는 합의가 이뤄지면 만족할 것”이라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트럼프, 44년 된 ‘대만과의 약속’ 흔들어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대만 무기 판매를 중국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쳐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중국 방문을 마친 뒤 전용기(에어포스원) 간담회와 언론 인터뷰에서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에 대해 “승인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며 “그건 중국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좋은 협상 칩”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첨단 미사일 등 약 140억달러(약 21조원) 규모의 대만 무기 판매 패키지에 대한 최종 승인을 미루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만의 생존과 직결된 무기 문제를 대중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을 드러내면서 한국과 일본 등 다른 동맹국과의 안보 공약도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미국이 레이건 정부 시절인 1982년 대만에 무기 판매 종결 시한 미설정, 중국과의 사전 협의 금지 등의 약속을 깼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미·중 정상회담 이후 중국이 5년 안에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더 커진 것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일부 조언자가 우려했다”고 보도했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페이스북을 통해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은 결코 희생되거나 거래될 수 없다”며 “미국의 대만 안보 공약에 기반한 안보 협력과 무기 판매는 역내 평화와 안정을 훼손하려는 움직임을 억제하는 가장 중요한 억지력”이라고 주장했다. 미·중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동의했다는 점은 우리에겐 위안거리다. 백악관은 미·중 정상회담 이후 홈페이지에 게시한 팩트시트(설명자료)를 통해 “미·중 정상이 북한의 비핵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환상적인 무역 합의”에도 시큰둥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 “환상적인 무역 합의”를 이뤘다고 자평했지만 경제 분야 성과는 대부분 후속 협상에 맡겨졌다. 중국은 오는 2028년까지 연간 최소 170억달러(25조5000억원) 규모의 미국 농산물을 수입하고 보잉 항공기 200대를 구매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보잉은 150대를 원했는데 200대를 얻었다. 많은 일자리와 관련된 큰 일”이라며 성과를 내세웠다. 하지만 시장이 기대한 500대는 물론 앞선 2017년 중국이 구매하기로 한 300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시 주석에게 “텍사스, 루이지애나, 알래스카산 원유를 사는 것을 보고 싶다”고 제안했는데 시 주석이 그 아이디어에 대해 “좋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은 에너지에 대한 끝없는 수요가 있고 우리는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며 에너지 수출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중국은 400개 이상 미국 쇠고기 시설에 대한 수출 허가를 갱신하고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청정 지역으로 판정된 미국 지역(주)에 대한 가금류 수입도 재개하기로 했다. 미·중은 민감하지 않은 상품의 교역을 다루는 무역위원회와 양국 간 ‘투자 포럼’ 역할을 하는 투자위원회 설립에도 합의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와 관련해 양국이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설치할 예정인 미·중 무역위원회에서 300억달러 규모 교역품이 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미·중 무역전쟁 속 중국이 보복 카드로 활용한 희토류와 핵심 광물 등에 대해서도 “공급망 부족과 관련해 중국이 미국의 우려를 다룬다”고만 했다. 미국이 그동안 문제를 삼아온 중국의 보조금 위주의 산업정책이나 기술탈취 문제도 별다른 합의가 없었다.
중국 외교 ‘문전성시’
시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 방중 직후 세계 각국 정상들을 초청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5월 19~20일 중국을 방문한데 이어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가 23~26일 연이어 중국을 찾는다. 시 주석이 트럼프에 이어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며 권위주의 진영의 연대를 강조한데 이어 이란 전쟁 종전 협상 중재국인 파키스탄 정상과 만나선 중동 지역에서의 존재감을 높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푸틴 대통령은 방중 직전 연설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국가통합과 주권 보호를 포함한 광범위한 사안에서 서로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서방 진영과 갈등을 빚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공조를 강화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도 방중 일정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과 소통하며 ‘한·미·일’ 연대 강화에 나섰다. 5월 17일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한반도 및 중동 정세 등과 관련한 미·중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받은 이 대통령은 “미·중 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인도·태평양 지역과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15일 중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통화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