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發) 경기 침체 논쟁이 한국에서도 번지고 있다. 한국 경제에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와는 다른 형태의 충격이 포착된다는 게 경기 침체론자들의 주장이다. 반면 아직 경제성장률 등의 지표를 볼 때 침체를 논할 수준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고(高)물가 속 경기 침체까지 겹치면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는 상당한 충격이라는 데 한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락하는 국채 금리…커지는 침체 우려
3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서울 채권시장에서 지난 1일 3년 만기 국채 금리는 전날 대비 0.111%포인트 내린 연 3.439%로 거래를 마감했다. 지난달 17일 연 3.745%까지 올랐다가 상승세가 꺾인 것이다. 시장에선 경기 침체 우려가 불거진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지금 당장은 한국은행이 고물가 때문에 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길게 보면 경기 둔화 때문에 금리를 계속 올리기 어렵다는 우려가 시장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통상 2분기 연속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면 경기 침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미국은 올 1분기 성장률이 연환산 기준 -1.6%(전분기 대비)를 기록했고, 2분기도 마이너스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의 1분기 경제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6%였다. 이달 발표 예정인 2분기 성장률도 플러스일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은 경기 침체가 아니라 둔화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경기 침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경기 후퇴나 침체라고 하면 성장이 연속적으로 마이너스 후퇴가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역시 “침체라고 이야기하려면 기술적으로 2분기 정도 마이너스 성장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숫자상으로 나온 건 아니다”라며 “슬로우 다운, 즉 둔화 정도로 이름을 붙이는 게 적절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침체로 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지금은 경기가 예상보다 둔화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경기 침체론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경제성장률이 비록 플러스긴 해도 잠재성장률(물가 급등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률)을 간신히 유지하거나 밑도는 수준이란 것이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안정적인 물가 수준을 유지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수준의 성장률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지출을 제외하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사태 전부터 2% 내외였고, 현재 장기 저성장 국면”이라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1%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내년에는 연간 1% 이하 성장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는 3~4% 성장하던 나라”라며 “경제성장률이 이보다 훨씬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어 기본적으로 경기 부진 상황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 침체라고 봐야 한다”며 “작년에 예측한 올해 경제지표를 올해 들어와서 다 낮췄다. 결국은 경기가 생각보다는 침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다른 지표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다. 향후 경기를 보여주는 선행종합지수 순환변동치는 지난해 2월부터 줄곧 100을 밑돌고 있다. 이 수치가 100 미만이면 3~6개월 뒤 경기가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를 떠받쳐 온 수출도 위기 상황이다. 올 들어 5월까지 10~20%대 증가세를 보였던 수출은 지난달 5.4% 성장에 그쳤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무역수지가 악화하면서 외환시장까지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우려했다.
과거 위기와 다른 충격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경기 침체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크라이나 사태, 기후변화 등과 같은 대외적인 요인으로 물가까지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겹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정책적 수단도 제한적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상당히 진행 중인 상황”이라며 “상황이 개선될 움직임도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한국은 -6.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물가 상승률은 7.5%대였다. 하지만 당시 경제 위기는 아시아 국가에 국한됐다. 미국의 성장률은 4.5%나 됐다. 한국이 빠른 회복세를 보인 것도 다른 주요국의 경제가 뒷받침한 것도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융위기 때에는 미국(-0.1%)이 고전했지만, 한국(3%)은 선방한 편이었다. 또 중국(9.6%)의 고성장이 세계 경제를 견인했다. 지금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까지 경기 침체를 걱정하고 있고, 중국의 저성장 우려도 나온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으로 시름하고 있다. 대외 의존성이 높은 한국 경제가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의 올해 물가 상승률 전망치(4.7%)를 고려하면 미국(7.7%), 영국(7.4%), 독일(5.5%) 등과 비교했을 때 상황이 낫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대출 이자, 재산세 등과 같은 자가 주거비가 물가 상승률을 산정하는 데 반영되지 않는다. 김상봉 교수는 “현재 물가 상승률에 2%포인트 내외를 더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미국과 영국 등에 비슷한 수준이 된다.
가계부채, 침체의 뇌관 우려
민간과 정부 부채는 경기 침체 충격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신용갭은 17.7%로, 조사 대상 43개국 가운데 일본(25.6%), 태국(21.4%)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신용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부채 비율이 장기 추세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나타내는 지표다. 이 비율이 높을수록 부채 위험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 부채 역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때 나타난 재정적자는 현재보다 지속 기간도 짧고 위기가 끝난 뒤 큰 폭으로 개선됐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재정수지 적자는 4년째 계속되고 있고, 국가채무비율은 5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문홍철 DB금융투자 연구원은 “특히 가계부채의 경우 한국에는 만성질환과 같은 침체 요인”이라며 “가계부채는 쉽게 떨지도 못하고 소비 위축과 같은 경기 침체의 악순환 고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신세돈 교수는 “국가적인 침체는 아니더라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저소득층 중심의 국지적인 경기 침체는 왔다고 보는 게 맞다”고 진단했다.
조미현/임도원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