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빠진 TPP'인 CPTPP, 일본 주도로 서명
트럼프 '재가입' 시사… '중국 견제' 목적일 수도
동참 의사 영국·태국 등과 연대해 협상력 높여야
정인교 < 인하대 대외부총장·국제통상학 >
지난 8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포괄적이고 점진적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서명됐다. 인구 5억 명,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3.5%인 12조4000억달러 규모의 무역블록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및 유럽연합(EU)과 함께 세계 3대 무역협정이 탄생한 것이다. 11개 회원국 중 6개국 이상 비준 완료 시 협정이 발효되므로 비준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올 하반기에 협정이 발효될 수 있다. 협정이 발효되면 참여국 모든 교역 품목의 99%(일본 95%)에 대한 관세가 철폐된다.
지난해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행정명령 이후 일본이 11개 회원국을 독려해 새로 합의한 협정이 CPTPP다. 협정 제목에 ‘점진적인(progressive)’이란 용어가 추가된 것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의 현실을 감안해 미국이 주도해 만든 ‘수준 높은’ TPP에 포함돼 있던 민감한 22개 사항을 삭제하거나 적용을 보류한 것과 관련이 있다.
지난 1년 동안 일본은 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 국가 간 다자무역협정을 살려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개도국에 민감한 의약품 데이터 보호기간 등 지식재산권 보호, 국영기업,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제도(ISDS), 서비스와 투자 등에 대한 규정을 완화시켰다. 또 캐나다의 문화산업 예외 조치 요구를 조정하는 등의 역할을 통해 TPP에서의 미국 지위를 대신 꿰차게 됐다.
TPP 발효는 아베노믹스 ‘3개의 화살’ 중 마지막 화살이다. 아베 정부는 비록 미국이 빠진 CPTPP 발효를 통해서라도 대외통상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TPP에 대한 생각을 바꾸거나 정권이 바뀌면 TPP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일본 통상당국은 판단했다.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더 나은 거래(a better deal)’가 가능하다면 TPP 가입을 고려할 수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트럼프다운’ 면모를 다시 보였다. 트럼프의 돌출 발언 배경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미국이 복귀하면 CPTPP 몸값이 훨씬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회원국들에 미국이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을 제시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일 수 있다. 미국 참여 시 TPP는 세계 GDP와 무역의 각각 40%, 30%를 포괄하게 된다. 그래서 ‘더 나은 거래’라는 조건을 달았을 수 있다.
두 번째 해석은 TPP를 지난 대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작품으로 폄하하면서 선거전략으로 ‘TPP 탈퇴’를 공약하고 대통령 취임 즉시 TPP 탈퇴 행정서명을 했지만, TPP가 ‘중국 견제’에 유용함을 뒤늦게 깨닫게 됐을 수도 있다.
지난 2월 말 미국상공회의소 행사에 참여한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이 TPP 다수 회원국과 TPP 복귀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미국의 복귀 전망은 밝지 않다. CPTPP 회원국은 미국의 복귀를 환영하지만, 미국을 위해 특별히 협정을 수정할 수 없고 현 CPTPP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회원국 입장이다. 복귀 시점도 CPTPP 협정 발효 이후에나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렵사리 국내 비준절차를 마친 국가들이 미국을 복귀시키기 위해 편파적인 내용을 CPTPP에 다시 반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CPTPP 가입을 검토할 시점이 됐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위상과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미국발(發) 일방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국제 통상질서를 흔드는 상황인 데다, 개정협상 중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CPTPP 가입은 일본과의 협상이 최대 관건이 될 것이고, 국내 제조업계 반발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가입에 일본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일본도 회원국 확대로 CPTPP 가치를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태국, 콜롬비아, 영국 등이 TPP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들과 단체가입 협상을 통해 협상 레버리지를 높이면서 경제효과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