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증언 문답…"광주통합병원서 희생자시신 200구 소각 추측"
5·18 당시 광주서 활동한 김용장·허장환 씨 국회서 증언
(서울=연합뉴스) 김여솔 기자 =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주한미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한 김용장 씨는 13일 "광주통합병원에서 희생자 시신 200구 정도가 소각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이날 오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에 대해 이같이 밝히고, "그렇게 계산해도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어 시신을 어디론가 다른 지역으로 수송됐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근무했다가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양심선언을 한 허장환 씨도 함께 회견에 나서 "전두환이 (계엄군 발포 직전인) 5월 21일 광주에 다녀갔다는 것은 확인된 사항"이라며 "입증해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기자회견에서 김용장·허장환 씨와의 일문일답.
-- 시신소각과 희생자 암매장 관련한 첩보는 있었는가.
▲ (김용장) 5공 청문회 때 정호용 씨가 '암매장은 없었다. 단, 있다면 가매장이 있었다'고 스스로 대답했다. 가매장한 시신은 재발굴해 일부는 광주통합병원에 가서 소각됐고, 일부는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김해공항으로 수송됐다. 광주에서 김해공항에 간 이유는 제 추론에 의하면 거기서 틀림없이 수장했을 것이다.
-- 당시 가매장한 시신을 지문채취 했다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는가.
▲ (허장환) 거의 100% 확인했다.
-- 그들은 행방불명으로 처리됐는가, 아니면 사망자로 확인됐는가.
▲ (허장환) 그 업무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시신유기를 그런 식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가매장된 시신 중 지문을 채취한 시신은 몇 구 정도인가.
▲ (김용장) 그 숫자는 보고서에 넣지 않았다. 다만 추론은 할 수 있다. 당시 광주통합병원에서 개조한 굴뚝에 2구 정도를 넣고 소각하면 2시간 정도 걸렸다. 하루에 20구씩, 10일 동안 200구 정도 소각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증거는 없다. 다만 그렇게 계산해도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어 어디론가 다른 지역으로 수송됐을 것이다.
-- 보안사령부가 시민 행세하는 사복군인(편의대)을 광주에 투입한 사실을 확인했나.
▲ (허장환) 1988년 청문회 당시 정호용 씨가 답변 과정에서 '요원들에게 편의복을 사주기 위해 왔다 갔다'고 말했다. 이는 정호영 씨가 편의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중요한 발언이다. 편의대를 총괄 지휘한 사람이 광주일고 출신 홍석률 대령이었다. 공작대가 몇 명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30∼40명이 아니고 수백명이 와서 활동하고 그때그때 활동 철수하고 다시 다른 사람들로 교체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 사복군인이라고 생각한 근거와 목격한 시간과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가.
▲ (김용장) 얼굴이나 움직임으로 봐서 군인들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일인지 20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들이 비행장 격납고에 들어가 우연히 밖으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3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봤고,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 5월 21일 전두환이 광주에 왔다는 증거 서류가 국내에 남아있는가.
▲ (김용장) 5·18 당시 작성돼 미 국무성과 국방부에 올라간 보고서는 이미 비밀 해제가 됐다. 한국 정부가 미국에 요청하면 당연히 내가 쓴 것들이 나올 것이다.
▲ (허장환) 전두환이 5월 21일에 광주에 왔다는 것은 확인한 사항이다. 전두환이 다녀갔다는 문제는 회의 석상에서 거명된 문제이며, 입증해 드릴 수 있다.
-- 헬기 사격 관련해 미국에 올린 첩보 내용을 설명해달라.
▲ (김용장) '5월 21일 낮에 UH1H 소형 헬기에서 M60으로 사격했다'고 보고했다. 위치는 도청 주변이었다. 27일에는 광주천 상공에서 위협 사격을 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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