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페미니스트 미술가의 자화상

입력 2018-08-30 17:15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페미니스트 미술가의 자화상

윤석남, 학고재서 개인전…채색한 자화상과 '핑크룸' 등 선보여

최근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 작품 소장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채 의자에 걸터앉은 반백 여인이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눈빛이며 입매가 서릿발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모습보다 매우 카리스마가 넘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그림 앞에 선 반백의 여인이 환하게 웃는다. "제 얼굴을 그리려면 거울을 보게 되는데, 문득 그런 모습이 보여요. 내면의 것이 드러난다고나 할까."

미술가 윤석남(79) 이야기다. 그는 1939년 만주에서 셋째딸로 태어났고, 화가가 되길 원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꿈으로만 간직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전업주부였던 윤석남이 붓을 잡기는 마흔이 돼서였다. 이후 여성과 생명, 환경을 다룬 독창적인 작업을 왕성하게 선보이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작가가 됐다. 자신과 역사 속 여성들을 다룬 작품 '금지구역I'이 2016년 영국 테이트미술관에 소장될 정도로, 세계 미술계에도 확실히 이름을 알렸다.

다음 달 4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개막하는 '윤석남' 전은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처음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자리다.

작가는 남편 없이 6남매를 키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어머니의 존재를 각별하게 기억한다. 주로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여성 문제를 다뤄왔던 작가는 이번에는 자화상을 통해 차분히 자신을 응시한다.



김만덕, 허난설헌, 이매창 등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은 역사 속 여성 또한 작가가 사랑하는 이들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 '이매창'(2018) 속 한복차림 여인의 대담한 눈빛이 강렬하다. 자화상 속 윤석남의 그것과도 연결되는 눈빛이다.

30일 만난 작가는 "자신은 없지만, 초상화 연작을 계속하고 싶다"라면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 농성을 벌인 여성 노동자 강주룡 이야기에 요즘 끌린다고 말했다.

3년간 불화를 배운 작가가 채색화에 도전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작가가 채색화에 관심을 둔 것은 수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 초상화 전시를 보면서부터다. "작품들을 보려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용산에 갔어요. (웃음)"

이번 전시에서는 1996년 처음 선보인 작품 '핑크룸'도 새롭게 재현됐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핑크빛인 공간은 일순간 달콤하지만, 날카로운 갈고리가 꽂힌 소파 쿠션, 서양식 의자와 어울리지 않는 한국식 옷을 통해 우리를 깨운다.

작가는 여든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인터뷰 내내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냈다. 그는 "요즘 종종 만나는 젊은 한국 여성들이 자의식이 강한 듯해서 좋다"고 말했다. '어떻게 살면 좋겠냐'는 물음에 잠깐 고민하던 작가는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나답게 살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10월 14일까지. ☎ 02-720-1524.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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