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단단한 악재라도 시장에 뚝 떨어지고 나서는 오래지 않아 사멸된다.
1997년 국내 금융위기 발생 당시 바닥까지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석 달 정도였고, 100년만의 위기로 금융경색을 만들었던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사태도 막상 파산 이후 바닥을 친 10월 27일까지는 고작 한달 정도가 걸렸을 뿐이다.
재료가 시장에 반영되는 시스템은 재료가 노출되기 전에 미리 반영되기에, 오히려 재료가 시장에 노출되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럽발 금융위기 사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양상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좀처럼 끝날 줄 모른다.
2010년 5월 현재 상황은 악재가 발생했던 최초 시점인 2009년 말보다 심화되어 급기야 지난 2월에 찍은 저점마저 훼손해버렸다.
물론 유로존 내에 구속력을 갖춘 확고한 의사 결정 기구가 없기 때문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지연시켜 더 큰 비용을 수반하게 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인 이유만으로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는 유로 악재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그 외 다른 요인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번 5월 4째주에 미국은 113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신규 발행했다.
심각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쓴 돈을 메우기 위해 격주로 채권 발행을 부지런히 하는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남유럽발 금융위기가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과연 남유럽 사태 없이도 미국 국채시장이 이렇게 호황을 맞을 수 있었을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 신규 화폐를 많이 발행한 나라의 채권 구매력이 떨어져 불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뻔한 악재임에도 불구, 응찰률이 3배에 가까운 돈이 몰리면서 미국채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것은 남유럽발 금융위기가 없었더라면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독일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리스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막강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수출 주도형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유로화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 수출 경쟁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속으로는 남유럽 사태가 속히 해결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5월 현재 독일의 닥스 지수가 지난 2월 저점을 깨지 않고 있는 등 주가가 비교적 견조한 것과 더불어 그리스 문제에는 미온적 태도를 견지해 온 독일의 태도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결국 유로 문제는 유로화의 하락에 거금을 베팅한 금융 투기세력과 채권의 왕성한 소화를 절실하게 원하는 미국 그리고 유로존 최대 경제블록으로서 수출경쟁력의 제고가 중요한 독일의 이해관계가 얽혀 더욱 해결의 시기가 늦춰지는 요인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글. 박문환 동양증권 강남프라임지점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