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20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부과에 대해 헌법 위반 판결을 내리며 제동을 걸었지만, 한국의 대미 통상 환경은 오히려 '시계 제로'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법적 근거였던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은 무력화됐으나, 트럼프 행정부가 즉각 강력한 '대체 관세' 카드를 예고하면서 우리 정부가 약속한 3500억달러(약 505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합의가 재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국회의 조세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산 수입품 전반에 부과되던 15~25%의 상호관세는 법적 근거를 잃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와 철강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본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안보 위협)와 무역법 301조(불공정 무역)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상호관세가 사라진 자리를 자동차에 대한 '핀셋 고율 관세'로 메우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관세법 338조를 동원할 경우, 미국을 차별하는 국가에 최대 50%의 보복 관세를 물릴 수 있다. 상호관세보다 더 강력한 대체 관세가 도입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가장 큰 쟁점은 한국 정부가 지난해 7월 약속한 3500억 달러(약 505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이다.
당시 한국은 관세 인하(25%→15%)를 대가로 이 같은 대규모 투자를 확약했다. 이제 관세 부과 자체가 위법이 된 만큼, "대가 없는 투자를 이행할 필요가 없다"는 재협상론이 국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여러 차례 "관세 정책의 연속성에는 변함이 없다"며 '플랜 B' 가동을 예고해왔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USTR)는 최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대법원이 행정부에 불리하게 판결해도 다른 법적 수단을 활용해 관세를 계속 부과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리어 대표는 "만약 대법원이 잘못된 방향으로 판결한다면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며, 이런 나라들이 추구하며 엄청난 대미 무역흑자를 일으키는 불공정한 무역정책 일부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도구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관세의 유형과 수준과 관련해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대체 수단으로는 이미 사용 중인 무역확장법 232조 관세 확대를 비롯해 무역법 301조와 122조, 관세법 338조 등이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미국 대법원으로부터 상호관세가 위법하다는 판결이 나오자 "수치스러운 것"(a disgrace)이라고 비난하며 "대체 수단"(backup plan)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한국 국회의 '대미투자특별법' 처리 지연을 이유로 관세 인상(15%→25%)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압박해왔다.
일본이 5500억 달러 투자를 확정하며 발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한국만 합의를 뒤집을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플랜 B'의 첫 번째 타깃으로 한국산 자동차를 조준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 이후 이어질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번 대법원의 위법 판결로 확보한 법적 우위를 지렛대 삼아 '실리적 재협상'에 나설 전망이다.
이날 청와대는 "정부는 연방대법원 판결 내용 및 미국 정부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국익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으로 (대응 방안을)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면적인 투자 철회가 오히려 보복 조치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합의의 틀을 유지하면서 부담을 줄이는 현실적 대응에 무게가 실린다.
3500억 달러 투자 계획은 유지하되 집행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 경우 초기 현금 투입을 최소화하고, 미국의 통상·관세 정책 방향이 보다 분명해진 이후로 일정을 늦춰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게 된다.
관세 인하 효과가 법적 변수로 흔들린 만큼, 미국 내 투자에 상응하는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명문화하도록 요구하는 카드도 있다.
특히 반도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관련 법에 따른 인센티브를 확정적으로 보장받아 불확실성을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