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법원 "트럼프 상호관세 위법"…6대 3으로 무효

입력 2026-02-21 00:47
수정 2026-02-21 02:49

미국 연방대법원이 20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를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한국 등 각국에 부과한 상호관세가 효력을 잃게 됐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를 대신할 다른 관세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아 오히려 관세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커졌다.

연방대법원은 이날 판결문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의회를 거치지 않고 관세를 부과한 것이 대통령 권한을 넘어선다고 밝혔다. 이는 1, 2심의 위법 판결 기조를 유지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6 대 3으로 이뤄졌다. 연방대법원은 전체 9명의 대법관 중 보수 성향이 6명, 진보 성향이 3명으로 분류되는데 보수 대법관 3명까지 위법 의견을 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2일 국가별 상호관세를 발표했다. 이후 8월 7일부터 상호관세를 적용하면서 각국과 관세협상을 벌였다. 한국도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등 관세율 인하를 위해 미국에 3500억달러의 투자와 광범위한 시장 개방을 약속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로 IEEPA를 근거로 도입한 상호관세와 트럼프 정부가 펜타닐(합성마약) 유통 책임을 물어 중국 등에 매긴 ‘펜타닐 관세’는 법적 기반을 잃게 됐다. 관세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온 트럼프 대통령도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기업들은 IEEPA에 따라 낸 상호관세 등을 돌려받을 길이 열리게 됐다. 블룸버그는 미국에서 제기된 관세 반환 소송이 지난달 초 기준 총 914건에 달한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당시 자체 추산을 통해 기업들이 환급받을 수 있는 관세가 최대 1500억달러(약 22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관세 환급 소송을 낸 기업들이 소송액만큼 관세를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상호관세와 펜타닐 관세가 무효화됐지만 IEEPA가 아닌 다른 법에 따라 부과된 관세는 이번 판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무역확장법을 근거로 한 자동차, 철강·알루미늄 등에 대한 품목관세가 대표적이다. 트럼프 정부는 앞으로 품목관세 확대 등 상호관세를 대체하는 관세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최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대법원이 행정부에 불리하게 판결해도 다른 법적 수단을 활용해 관세를 계속 부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도 대법원 판결 전 “전체 세수 측면에서 대략 같은 수준으로 관세를 계속 징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역법 301조와 122조, 무역확장법 232조 등 3개 조항을 언급하며 이를 근거로 상호관세와 동일한 관세 구조를 다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쓸 수 있는 통상 카드가 여전히 많은 만큼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뒤집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트럼프 '플랜B'로 품목관세 늘릴 듯…세계경제 불확실성 증폭
"관세 부과 권한은 의회에 있다"…1·2심 위법 판결 그대로 유지세계 경제가 또다시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주장하며 도입한 상호관세와 이른바 ‘펜타닐 관세’가 대통령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고 판결하면서다. 트럼프 정부는 즉각 ‘플랜 B’를 가동할 방침이다. 각국이 상호관세 인하를 위해 트럼프 정부와 합의한 대미 투자 등 협상 결과를 두고도 논란이 커지게 됐다.

◇삼권분립 와해 경계미 대법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한 경제 논리보다 미국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인 삼권분립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더 비중 있게 살폈다. 대법원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이용한 관세 부과가 의회에 과세권을 부여한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IEEPA를 활용한 대통령의 관세 부과를 허용하면 의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이 약해지고 의회 권한이 지속적으로 행정부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봤다.

존 사우어 미 법무부 차관은 지난해 11월 대법원 심리 과정에서 “세금 부과는 의회의 고유 권한”(존 로버츠 대법원장)이란 지적을 방어하기 위해 관세 조치가 “규제에 따른 부수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초 공개된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관세를 ‘라이선스 수수료’ 형태로 재포장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관세는 세금이 아니라 기업들이 미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정부에 지불하는 수수료일 뿐이라는 것이다. 포장을 바꿔도 내용물이 똑같다면 다시 한번 소송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임기를 넘길 수 있고, 시간이 지나 환급 규모가 더 커진다면 대법원이 이를 영원히 막을 수는 없다는 계산으로 해석된다. ◇다른 관세 도입 가능성이 밖에도 트럼프 정부는 대법원의 상호관세 무효 판결에 대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 왔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역확장법 232조를 이용한 품목관세를 확장하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이미 철강·알루미늄에 50%, 자동차·차 부품에 25%(한국·일본·유럽연합은 15%) 등 주요 품목에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품목관세는 트럼프 1기 정부부터 운영됐기 때문에 상호관세보다 법적 안정성이 높다.

다만 품목관세는 어떤 상품이 대상인지, ‘철강을 주된 소재로 쓴 반도체 포함 자동차부품으로서 여러 원산지에서 생산된 부품을 결합한 완성품’ 식의 복합적 상품에는 어떤 관세율을 적용할지 등 실행 과정의 혼란이 적지 않다.

대통령이 심각한 무역적자에 대응하기 위해 최장 150일간 최고 15% 관세율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한 무역법 122조를 쓰되 150일로 정해진 기간을 계속해서 연장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미국 기업을 차별하는 나라에 대해 최고 50% 관세율을 허용하는 관세법 338조도 트럼프 정부가 쓸 수 있는 대안으로 꼽힌다.

트럼프 정부는 각종 관세 부과에 힘입어 지난해 2885억달러의 관세를 거둬들였다. 2024년 관세 수입 983억달러의 세 배에 달한다. 트럼프 정부는 관세 수입 덕분에 미국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고 대부분의 미국민에게 2000달러씩의 ‘관세 배당금’을 나눠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호관세가 무력화돼도 트럼프 정부가 관세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이 낮은 이유다. ◇대미 투자 논란될 수도각국이 상호관세 인하를 위해 미국에 약속한 대미 투자를 둘러싼 논란도 커질 수 있다. 한국만 해도 상호관세 인하(25%→15%) 등을 위해 미국에 3500억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일본은 5500억달러, 유럽연합(EU)은 6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호관세의 효력이 사라진 만큼 대미 투자를 이행하는 게 맞는지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각국에서 미국과의 재협상론이 불거질 수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애초 목적이 관세를 부과한 후 이를 지렛대 삼아 각국으로부터 투자 약속 등을 얻어내는 것이었던 만큼 이를 되돌리자는 제안에 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제비상경제권한법

IEEPA. 미국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 때 외국과의 거래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한 연방법으로 1977년 제정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승인 없이 이 법을 근거로 상호관세와 함께 중국에 펜타닐(합성마약) 유통 책임을 묻는 ‘펜타닐 관세’를 부과해 논란이 됐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