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내놓은 무·저해지 보험의 해지율 가정 가이드라인을 두고 보험업권에서 ‘눈치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애초 대부분 보험사는 실적 충격이 덜한 낙관적 가정(예외 모형)을 쓰려고 했지만 금융당국이 보수적 가정(원칙 모형)을 채택하라고 강하게 압박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메리츠화재, 한화생명 등 주요 보험사가 원칙 모형을 쓰겠다고 발표해 나머지 보험사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원칙 모형 택하는 보험사
13일 동양생명은 기업설명회(IR)에서 “무·저해지 보험의 해지율 가정과 관련해 원칙 모형을 쓸 것”이라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실적 충격이 큰 보수적 가정을 쓰겠다는 의미다. 무·저해지 보험과 단기납 종신보험 해지율 등 새 회계기준(IFRS17) 제도 개선 영향을 모두 반영하면 동양생명의 보험계약마진(CSM)은 4000억원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일 한화손해보험도 IR에서 “일각에서 예외 모형을 얘기하고 있으나 원칙 모형을 사용해야 할 상황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화손보는 원칙 모형을 준수하면 CSM이 1900억원가량 줄어들고 지급여력(K-ICS) 비율은 10%포인트가량 낮아질 것으로 추정했다. 한화생명과 메리츠화재도 이날 열린 IR에서 무·저해지 보험 해지율과 관련해 원칙 모형을 쓰겠다고 했다.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1위 생명보험사 삼성생명과 1위 손해보험사 삼성화재도 원칙 모형을 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국 압박 통했나7일 금융당국이 ‘IFRS17 주요 계리가정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직후와 비교하면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그동안 보험사들은 무·저해지 보험과 관련해 해지가 많을 것으로 가정하고 CSM을 부풀렸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당국은 무·저해지 보험의 해지율 가정을 산출할 때 시간이 갈수록 해지율이 빠르게 낮아지는 ‘로그-선형 모형’을 원칙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선형-로그 모형’도 예외로 인정하기로 했다.
예외 모형은 원칙 모형보다 해지율이 완만하게 떨어져 실적 충격이 그만큼 작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대부분 보험사는 수익성과 보험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외 모형을 쓰겠다는 입장이었다.
금융감독원은 11일 주요 보험사와 간담회를 열고 “당장의 실적 악화를 감추고자 예외 모형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경고했다. 예외 모형을 선택하면 금감원이 해당 보험사를 집중 검사하고 대주주 면담까지 하겠다며 압박 강도를 높였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경쟁사가 예외 모형을 쓰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금감원 개입 이후 보험업권 전반에 원칙 모형을 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무·저해지 보험을 많이 판매한 DB손해보험, 현대해상, 롯데손해보험 등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다. 무·저해지 보험을 많이 팔거나 해지율 가정을 낙관적으로 쓴 회사일수록 원칙 모형 적용 시 실적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당국이 원칙과 예외라는 선택지를 주고선 이제 와서 원칙 모형을 채택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형교 기자 seogy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