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번주 만난다. 소프트뱅크가 지분을 갖고 있는 영국의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 ARM과 삼성전자 간 ‘전략적 제휴’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산업계에선 최근 자금 사정이 안 좋은 손 회장이 이 부회장에게 ARM 지분 매입을 요청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방한 목적은 ARM 세일즈
2일 산업계에 따르면 손 회장은 지난 1일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손 회장은 방한 목적을 묻는 말에 “비즈니스 목적”이라고 짧게 답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손 회장은 최근 주변에 “이 부회장과 전략적 제휴에 관해 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도 지난달 21일 김포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손 회장이 무슨 제안을 하실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며 ARM에 대해 언급했다. 시장에선 손 회장이 ‘ARM 지분 매입’을 요청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ARM은 영국에 본사를 둔 팹리스다. 삼성전자, 애플 등 유명 반도체기업에 설계기술(IP)을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는다. 손 회장은 2016년 ARM을 320억달러에 인수했다. 하지만 우버, 위워크 등에 대한 투자 손실이 불어나자 ARM을 매물로 내놨다. 2019년 미국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전문 업체 엔비디아는 400억달러(주식 215만 주+현금 120억달러)에 ARM을 인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ARM의 특허를 무기로 경쟁사들을 압박할 것이란 각국 경쟁당국의 우려가 커졌다. 유럽연합(EU), 영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친 엔비디아는 올초 ARM 인수를 포기했다. ‘계륵’ 같은 ARM삼성전자로서도 ARM은 관심을 가질 만한 인수합병(M&A) 대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래도 단독으로 M&A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엔비디아의 전철을 밟을 게 뻔한데 삼성전자가 헛심을 쓰겠냐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전 세계에서 반도체 사업을 하고 있다. ARM을 단독 인수하면 독과점 문제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한 대기업 사장은 “삼성이 ARM을 인수해도 경쟁당국의 심사를 통과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회장이 이 부회장에게 ‘삼성이 주축이 된 컨소시엄의 M&A’를 요청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무산된 이후 인텔, 퀄컴, SK하이닉스 등은 ‘컨소시엄을 통해 ARM을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변수로 꼽힌다. 컨소시엄을 구성해 ARM을 인수한다고 해도 중국 경쟁당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겠냐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기업을 컨소시엄에 끼워 넣는 방안이 있지만 이 경우 미국 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만남에 큰 기대 말아야” 의견도따라서 두 사람이 삼성전자가 ARM의 소수지분을 인수하는 ‘프리 IPO 투자(기업공개 전 투자)’ 방안을 논의할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ARM이 IPO 전문가를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영입한 것도 이 같은 관측에 무게가 실리는 요인이다.
관건은 가격이다. 시장에선 손 회장이 ARM의 가치로 엔비디아가 제시한 400억달러 이상을 부를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가 만약 지분 5%를 인수한다고 하면 적어도 20억달러(약 3조원)를 투입해야 한다.
이에 대해 ‘실익도 없는 소수지분에 수조원을 써야 하냐’는 의견이 제기된다. ARM의 핵심 계열사인 ARM차이나가 지난 5월 중국 정부에 사실상 넘어간 것도 투자 효용성을 낮추는 요인으로 꼽힌다. 경제계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ARM 관련 언급 중 ‘잘 모르겠다’에 주목해야 한다”며 “두 사람의 만남에 시장의 기대가 너무 큰 것 같다”고 지적했다.
황정수/정지은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