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빅픽처 못 그리는 삼성

입력 2021-08-02 17:47
수정 2021-08-03 00:22
‘주가는 실적의 그림자’라는 증시 격언이 삼성전자엔 맞지 않는 것 같다. 최고 실적에도 ‘7만전자’라는 조롱이 따라붙는다. 외국인투자자의 줄기찬 매도공세 속에 동학개미들도 자신감을 잃고 지쳐가는 모습이다.

삼성전자의 눈부신 실적을 보면 답답한 주가 흐름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난 2분기에 매출 63조6700억원, 영업이익 12조57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은 20.2%, 영업이익은 54.2% 뛰었다.

호실적의 일등공신은 반도체였다. 2분기 영업이익의 55%(6조9300억원)가 반도체에서 나왔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코로나발 반도체 특수 속에 30년간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실적이 좋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삼성전자가 애널리스트들의 전망을 훌쩍 뛰어넘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보여준 게 한두 번도 아니다.

정작 시장이 기대했던 건 비전(미래 성장동력)이었다. 주가는 미래를 먹고 산다. 현재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앞으로의 기대감이 없으면 매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시장은 판단한다. 7만전자 주주들도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다. ‘불안한 메모리 1위’를 넘어서는 감동과 메시지를 투자자들에게 줘야 한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2019년 4월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시스템 반도체를 비롯한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글로벌 1위로 도약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없다. 오히려 TSMC가 삼성전자의 추격을 뿌리치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더 적극적이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시장점유율 55%)인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약 690조원. 470조원가량인 삼성전자보다 1.5배 정도 많다. 상당수 서학개미가 테슬라에서 TSMC로 갈아탔을 정도다.

TSMC는 미국에 3년간 1000억달러(약 113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 5곳을 추가로 늘리기로 했다. 일본과 독일에도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대만 정부가 미·중 패권경쟁 이후 한층 높아진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적극 활용하면서 TSMC에 운신의 폭을 넓혀주고 있어 삼성전자보다 유리하다는 평가다.

TSMC를 쫓아가기도 바쁜 삼성전자 앞에 인텔도 복병처럼 등장했다. 지난 3월 파운드리 시장 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미국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은 한술 더 떠 ‘기술적 한계’로 꼽히는 2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급 반도체를 2025년 양산하겠다고 공언했다.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산업을 국가 안보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기로 하는 등 인텔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미 상원은 앞으로 5년간 반도체산업에 520억달러를 투자하는 법안을 지난 6월 통과시켰다.

반도체 업체들은 무한경쟁에 빠져들었다. 미국 마이크론은 세계 최초로 176단 모바일용 낸드플래시 양산에 돌입했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을 주도해온 삼성전자의 초격차 전략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인텔의 ‘파운드리 선전포고’ 다음날 대만 정부는 TSMC의 2nm 칩 공장 신설 계획을 승인했다.

삼성전자를 보는 불안한 시각은 2분기 실적 발표 뒤 쏟아진 증권사 리포트에서도 드러났다. 한 증권사는 “어닝(실적)은 차고 넘쳤지만, 그 무언가(비전, 전략, 변화 등)는 부족해 보였다. 잘나가는 회사들이 그리고 있는 빅픽처가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올 들어 코스피지수가 12%가량 오르는 동안 삼성전자 주가는 2% 떨어졌다. 대형 인수합병(M&A)이든, 파운드리 분야의 성과든 모멘텀이 필요한 시기다. 최고경영자(CEO) 한두 명이 ‘삼성의 순간’을 만들어 낼 중대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미국, 대만처럼 정부가 전면에 나서 전폭적인 지원은 못 해주더라도 최소한 ‘리더십 공백’은 메꿔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