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다. UNCTAD가 특정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한 것은 설립 57년 만에 처음이다.
UNCTAD는 지난 2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 회의에서 한국을 A그룹(아시아·아프리카)에서 B그룹(선진국)으로 옮기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UNCTAD는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 참여 증진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엔 산하기구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갖추고 있고 2년 연속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되는 등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점이 반영됐다.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진국에 걸맞은 역할을 부여하겠다는 취지다. 이번 결정으로 한국은 1964년 UNCTAD가 설립된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된 최초의 국가가 됐다. 한국의 합류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으로 구성돼 있던 선진국 그룹은 32개국으로 늘었다.
이태호 주(駐)제네바한국대표부 대사는 “‘무역은 경제 발전을 위한 중요한 도구’라는 UNCTAD의 격언을 진정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195개 회원국 만장일치…'한국은 선진국' 유엔이 공인
높아진 위상 반영한 상징적 조처…민주주의·인권 등 책임 더 커질 듯지난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무역개발이사회 회의에서 한국을 선진국으로 공인하는 데 대해 195개 회원국 가운데 반대한 국가는 없었다. 한국은 그동안 국제사회의 여러 지표에서 사실상 선진국으로 분류돼왔지만 이번에 유엔으로부터도 선진국으로 공식 인정받은 것이다.
UNCTAD는 B그룹(선진국 32개국·한국 포함)을 제외한 회원국들이 속한 대륙에 따라 A그룹(아시아·아프리카 98개국), C그룹(중남미 33개국), D그룹(러시아·동유럽 25개국)으로 분류한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4일 자신의 SNS에 “이제 우리는 과거의 대한민국이 아니다”며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시야를 더 넓게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며 최초로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변모한 데 이어 2016년에는 22개 주요 채권국협의체인 ‘파리클럽’에 21번째로 가입하며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2019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공식적으로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기도 했다. 주요 국제 지표 중 한국이 선진국으로 분류되지 않은 건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지수가 거의 유일하다. MSCI는 2008년 한국을 선진시장 관찰 대상국에 편입했지만 2014년 이 지위를 박탈한 이후 아직까지 한국 주식시장을 ‘신흥시장’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UNCTAD에서의 지위 변경이 상징적인 의미에 그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UNCTAD 내 실질 협상은 77개 개도국 그룹(G77)+중국, 유럽연합(EU), EU를 제외한 기타 선진국 그룹(JUSSCANNZ),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등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정치 그룹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한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하며 G77에서 탈퇴한 뒤 지난 1월부터는 JUSSCANNZ에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협상 차원에서는 이미 기타 선진국들과 보조를 맞춰온 셈이다. 한국이 유엔에 내는 분담금도 별 차이는 없을 전망이다.
한국이 유엔으로부터 선진국으로 공식 인정받으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등 국제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에서 더 많은 책임을 요구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미국·일본·EU 등 기존에 이미 선진국으로 분류되던 국가들은 이 같은 가치를 중심으로 중국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분류됨에 따라 미·중 갈등 속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게 힘들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더 큰 목소리를 내라는 국제사회의 요구가 강해질 수 있다”며 “미·중 갈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체적인 아젠다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