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與, 외환위기 때 내놨던 무기명 채권 도입 검토

입력 2020-03-31 17:32
수정 2020-04-01 02:11

더불어민주당이 1998년 이후 22년 만에 무기명 채권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풍부한 시중 유동자금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 필요한 재원으로 쓰기 위해서다. 채권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무기명 채권은 상속·증여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 자산가를 중심으로 수요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금융투자업계의 관측이다.

원내대표단, 무기명 채권 도입 논의

31일 여권에 따르면 민주당 최운열 금융안정태스크포스(TF)단장과 손금주 의원 등 일부 의원은 최근 원내대표단 회의에서 한시적인 무기명 채권 발행을 제안했다. 최 단장은 “사상 최저 수준의 금리로 인해 급증한 유동자금을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쓸 수 있는 방안”이라며 “금리를 제로(0)나 마이너스로 발행하면 정부의 채무 부담도 덜 수 있다”고 말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당 성향을 떠나 비상시국에 쓸 수 있는 방안은 다 써야 한다’는 긍정적 반응이 나왔다”고 전했다.

무기명 채권의 발행 주체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국가가 직접 발행하거나 공공기관 등이 발행할 수도 있다. 특정 기간에 한시적으로 발행하고, 조성 자금은 회사채 매입이나 중소기업·자영업 지원 등에 한정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채권 이자율은 제로(0) 금리 또는 마이너스 금리로 정해질 전망이다.

정부가 가장 최근 무기명 채권을 발행한 건 외환위기 때인 1998년이다. 5년 만기에 이자율도 당시로선 낮은 연 6% 안팎에 그쳤지만 3조8744억원이나 발행했다. 마련된 자금은 △실업자 지원 △중소기업 지원 △증권시장 안정 등 제한적 용도로 쓰였다.

여권은 무기명 채권 발행으로 상당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1998년보다 두 배 이상은 조달할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코로나19로 어려워진 기업의 회사채 매입과 중소기업·자영업 지원 등에 쓰여질 전망이다. 손 의원은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회사들을 살릴 자금을 마련하는 데 무기명 채권 발행은 좋은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 상반기 만기를 맞는 회사채·기업어음(CP) 물량은 약 78조원 규모다. 이 중 비우량 채권(신용등급 A 이하)과 CP(A2- 이하)가 28조4595억원에 달한다. 정부가 채권시장안정펀드 등을 통해 회사채 매입을 지원하고 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충분한 ‘실탄’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야당 동의 관건

무기명 채권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야당 동의와 여론이 중요하다. 야당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채권 발행엔 동의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코로나19 위기 대응 차원에서 ‘코로나 국민채권’ 발행을 제안한 바 있다. 정부가 공공기관을 통해 액면가 100만원짜리 채권을 총 40조원 규모로 발행해 일반 국민이 금융회사에서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일부 계층에 혜택이 집중된다는 측면에서 논란이 불가피하다”며 “먼저 국민의 동의를 얻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권 전문가들은 무기명 채권이 나온다면 낮은 이자율에도 자산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수요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무기명 채권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최대 50%에 달하는 상속·증여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1998년에도 부유층의 상속·증여 수단 등으로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의 한 프라이빗뱅커(PB)는 “무기명 채권은 서울 ‘강남 부자’들의 절세 상품으로 떠오를 것”이라며 “1인당 매입 금액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수 감소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작년 한 해 걷힌 상속·증여세는 1조1012억원 수준이다.

일각에선 하락 추세로 접어든 서울 아파트값이 더 떨어질지 모른다는 전망도 나온다. 상속·증여세를 내고 아파트를 물려주는 대신 아파트를 판 자금으로 무기명 채권을 사는 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