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비사업장에서 조합 집행부와 시공사를 교체하려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집행부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공사비·설계와 관련한 시공사의 말바꾸기 등에 불만을 품은 조합원들이 늘어난 까닭이다. 한 조합 관계자는 “어차피 분양가 상한제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에 더 늦어지더라도 이 참에 그동안 곪은 문제를 잘라내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흑석9구역 ‘폭풍전야’
26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울 흑석동 흑석9구역조합은 시공사인 롯데건설과의 계약 해지안을 오는 28일 대의원회에서 심의한다. 대의원회 의결이 이뤄질 경우 다음달 15일 열리는 조합총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될 예정이다.
흑석9구역은 중앙대 인근 흑석동 90일대 약 9만4000㎡를 재개발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10월 관리처분계획인가를 받아 이주와 철거를 앞두고 있다. 사업 막판 시공사 교체가 거론되는 건 건설사가 내세웠던 대안설계가 건축계획에 반영되지 않아서다. 당초 조합은 최고 25층, 21개 동, 1538가구 규모의 아파트를 짓는 내용으로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았다. 이후 롯데건설이 최고 층수를 28층으로 높이고 동(棟)수는 11개 동으로 줄이는 안을 제시하면서 시공사로 선정됐다. 건물 숫자가 확 줄어드는 만큼 조합 원안보다 쾌적한 단지로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롯데건설이 제시한 재정비촉진계획 변경 안건은 지난해 연말 서울시와 동작구의 합동보고에서 부결됐다. 서울시 도시계획의 밑그림인 ‘2030 서울플랜’은 흑석9구역 등 2종일반주거지의 최고 층수를 25층으로 제한하고 있어서다. 결국 롯데건설은 이에 맞춰 층수를 25층으로 낮췄다. 대신 대안설계보다 5개 동 늘린 16개 동짜리 안을 꺼냈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합의 원안과는 차이가 커서 다시 인·허가 절차를 밟아야 한다. 조합원 A씨는 “촉진계획 변경 절차를 진행하면 시간이 더 지체되기 때문에 조합 원안대로 25층, 21개 동을 짓는 게 더 빠를 것”이라며 “도급계약서엔 28층안을 관철시키지 못할 경우 공사보증금 379억원을 조합에 귀속하고 시공권을 박탈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설명했다.
조합원들은 시공계약을 해지할 사유가 생겼음에도 조합 집행부가 시공사를 두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총회 안건마저 조건부로 상정될 예정인 탓이다. 바로 시공계약을 해지하는 안건과 수정된 대안설계인 ‘25층·16개 동 안’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해지하는 안이다. 조합원 B씨는 “집행부가 어떻게든 시공사에 기회를 더 주려고 머리를 쓰고 있다”면서 “시공계약 해지 이후엔 사업 지연의 책임을 물어 집행부 교체 안건도 상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달 시공계약 해지안이 총회를 통과하고 집행부마저 교체될 경우 흑석9구역 재개발사업은 상당 기간 지연될 전망이다. 그러나 첫 단추인 시공사 교체부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롯데건설이 3.3㎡당 4200만원의 일반분양가를 계약서에 명시했기 때문이다. 주변 분양가보다 3.3㎡당 1000만원 이상 높은 가격이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시공계약이 해지되면 다른 건설사들이 같은 조건으로 입찰할지 미지수”라며 “기존 시공사와의 송사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합 집행부 해임 ‘러시’
강남권 다른 조합에서도 비슷한 사안의 총회 일정이 하나둘 잡히고 있다. 후분양 방식을 택한 반포동 신반포15차 재건축조합은 다음달 10일 조합장과 조합 임원 등을 해임하기 위한 총회를 연다. 집행부가 시공사였던 대우건설과의 계약을 무리하게 해지하면서 조합원들의 피해가 커졌다는 이유다. 시공사 재입찰은 총회 하루 전에 마감된다.
잠실 일대 ‘알짜 재건축’ 단지인 신천동 미성·크로바조합도 내홍을 앓고 있다. 이 조합은 다음달 7일 조합장 등 임원 9명에 대한 해임안을 조합원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이들이 일방적으로 시공사의 특화설계를 포기해서다. 대신 특별건축구역 지정을 받아 용적률 상향 혜택을 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묻지 않은 게 사업 막판 집행부를 교체하려는 이유다.
재건축 사업이 20년 가까이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는 은마아파트에서도 추진위원장 교체 움직임이 불고 있다. 현 추진위원장의 임기 8년 동안 사업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해서다. 은마아파트는 2003년 추진위를 설립했지만 49층 초고층 재건축안 등을 밀어붙이다 아직 정비구역 지정도 받지 못했다.
현 추진위원장의 임기는 지난 17일 만료됐다. 하지만 재선임 절차를 진행할 선거관리위원 선정을 두고 잡음이 일면서 임기가 임시로 연장되고 있는 상황이다. 강남구청이 선관위원 선임 등을 중재했지만 추진위가 이에 대한 행정소송과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선거가 언제 열릴지조차 알 수 없다. 비대위 측은 심리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추진위원장 해임 총회부터 열기 위해 동의서를 걷고 있다. 이미 토지등소유자 4900여 명 가운데 850여 명으로부터 동의를 얻어 발의 요건(10%)을 채웠다. 비대위 관계자는 “재건축사업이 뚜렷한 답 없이 지연되면서 주민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총회에선 과반 이상의 동의율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의서가 2000장 이상 걷히면 바로 발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