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 한·일 갈등에 대해 “양국 정상이 모두 원한다면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아폴로11호 달 착륙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국 대통령이 내게 관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무역과 관련해 여러 마찰이 있다고 했다”며 “일본은 한국이 원하는 뭔가를 갖고 있고, 그는 내게 관여를 요청했으며, (한·일 정상) 둘 다 원하면 나는 (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재자 역할’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20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일 갈등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한 바가 있다”며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언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두 정상을 좋아한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거기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들이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한·미·일 3국의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일단 한·일 양국이 풀어야 할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4일 한국에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면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볼턴 보좌관은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한다.
트럼프 "문 대통령 좋아하고, 아베는 특별"…韓·日갈등 '중립'에 무게
“나는 두 정상을 좋아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고(I like president Moon),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매우 특별하다(He’s a very special guy).”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한·일 갈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날 아폴로 11호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는 백악관 행사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한·일 갈등을 푸는 데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내비친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미온적인 태도여서 미국의 중재 카드가 먹힐지는 미지수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3주 만에 침묵 깬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중재자 역할’을 당부한 지 약 3주 만에 당사자 간 해결을 촉구했다. 그는 “나는 두 정상을 좋아한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거기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들이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청와대에서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은 “한·일 갈등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대해 “내가 얼마나 많은 일에 관여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한 뒤 “북한과 관련된 일을 돕고 있고, 그 외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대화 내용에 대해 “하지만 문 대통령은 여러 마찰이, 특히 무역과 관련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며 “일본은 한국이 원하는 뭔가를 갖고 있고, 그는 내게 관여를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아마도 (한·일 정상) 둘 다 원하면 나는 (관여)할 것”이라고 짧게 중재 의사를 전했다. ‘아마도 둘 다 원하면’이라는 전제를 단 것을 감안하면 당장 중재에 나서기보다 양국이 스스로 해결하는 데 무게를 실은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일 사이에 개입하는 건 마치 풀타임(full time) 직업을 가진 것과 같다”고도 했다.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이라는 뜻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시간을 뺏는 새로운 요청에 대해 한탄했다”고 전했다. 일본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과 관련,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중재 요청에 불만을 표출했다”고 해석했다.
‘지소미아 파기’ 통할까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 마땅한 외교적 카드를 확보하지 못한 한국 정부는 미국 측의 역할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은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에 긴장이 고조되던 지난 10일 3박4일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DC를 찾았다. 미 행정부, 의회 관계자를 두루 만난 뒤 귀국길에 그는 “생각한 목표를 충분히 이뤘다”며 “일본 조치의 부당성을 잘 설명했고, 미국 측 인사들은 예외 없이 이런 입장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한국을 찾은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와 지난 17일 40분간 회동한 김 차장은 한·일 갈등에 대해 “스틸웰 차관보가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했다.
19일 일본 정부가 추가보복 조치를 예고하자 청와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가능성을 언급하며 미국의 개입을 압박하기도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소미아의 모호성 때문에 협정을 통해 서로 교환하는 정보의 질적인 정도를 다시 살펴보자는 의미”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한·미·일 안보 협력까지 흔들릴지 모른다는 점을 거론하며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당부한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지소미아의 파기 가능성을 두고 “모든 옵션을 검토한다”고 해 파장을 일으켰다.
美 “중재 계획 없다”
외교 전문가 사이에선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카드를 꺼내든 것은 섣부른 전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미국을 적극적인 중재자로 끌어들이겠다는 포석이었겠지만 한·미·일 안보 협력을 한국 정부가 흔들려는 것은 미국도 원치 않을 것”이라며 “성급한 카드였다”고 꼬집었다.
침묵을 깬 트럼프 대통령의 한·일 갈등 관련 발언 역시 우리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분석이다. 한 외교 전문가는 “미국은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가길 결코 원하지 않는다”며 “양국 간 공조가 잘 돼야 동북아 지역이 안정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일단 한·일 간 자체 해결책을 갖고 오기 전엔 적극적으로 끼어들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미국 국무부도 미국의 중재 가능성을 일축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19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일 간 갈등 중재에 나설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양국이 역내 주요 사안에 집중하라고 촉구하는 것 외에는 중재할 계획이 없다”며 “미국은 우리의 가까운 두 동맹국이 진지한 논의를 통해 이번 사안을 해결하길 촉구한다”고 말했다.
박재원/이미아 기자 wonderful@hankyung.com